V
장르: 느와르
<개와 늑대의 시간>
후모(트위터 @Humo_0543)
맹수 같은 그것은 기어이 무릎을 꿇었다. 그때 숨통을 끊지 않은 건 단지 호기심이었다. 쇠파이프를 종잇장처럼 구겨버리고 혼자서 건장한 사람 몇을 상대하는, 인간이라 불리기는 힘든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 순혈 인간임에도 맹수에 필적하는 대접을 받는 다나지만, 눈앞에 있는 이에게는 정말 맹수의 피가 섞여있었다. 묘한 미소가 절로 퍼졌다. 테이프며 밧줄을 남은 완력만으로 끊어낸 그 혼혈은 이제 제법 두꺼운 사슬에 묶이고 있었다. 반항심을 거두지 못한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목을 낮게 긁는 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저지하려는 조직원 여럿을 단숨에 제압한 그는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건 동족이었다. 비록 다나를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 그와 가장 닮아있는 것.
죽이지 말고 적당히 묶어봐. 피가 묻은 손을 대충 흔들었다. 견고한 등과 어깨가 거친 숨에 맞춰 치밀었다. 상황의 불리함을 알고 본능에 따라 취하는 태도와는 다르게 살기를 꺼뜨리지 않는 눈이 마음에 들었다. 무슨 연유인지 한 쪽만 빛나고 있었지만, 다나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여념이 없었다. 흉포한 혼혈 앞에서 겁을 먹은 듯 보였던 다나의 수족들은 혼혈의 몸을 묶은 사슬이 겹겹이 늘어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기세등등해졌다. 물밀 듯이 들어온 상대 파 사람 중 반을 찢어놓은 게 염호임에도, 그 사슬 몇 겹이 자신들을 지켜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태우겠습니다, 보스. 우렁찬 기합과 함께 무릎을 꿇었던 형체의 몸이 들렸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그 사슬들은 종잇장처럼 찢어지고 말았다.
거친 숨을 내뱉는 그것의 손안에서 목뼈가 부러진 몸뚱어리가 흘러내렸다. 다른 쪽 어깨를 잡고 있던 부하는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멀리 날아가 있었다. 다나의 입에서 소리 없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정말로 맹수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무언가였다. 손톱이 날카로운 손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방금까지 살아있던 사람에게서 나왔으니 역겨우리만치 뜨거운 피일 것이다. 안광은 곧 다나를 향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인 측근 두엇을 제지한 다나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할 수 있어? 그가 천천히 걸어왔다. 기척을 죽인 발걸음은 느린가 싶으면 빠르게 다가와 있었다. 방금 제가 죽인 게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는 듯, 그만한 체력을 쓰지 않았음에도 숨을 헐떡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퀴퀴한 공간에 숨소리 하나밖에 울리지 않는 이 상황이 다나에게는 퍽 흥미진진했다. 금방이라도 죽일 것 같은 눈을 하고 다가오는 그 맹수가 육감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어느새 손만 뻗으면 목이 쥐어질 거리였다. 다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혼혈의 눈을 마주했다. 그는 손을 뻗지 않았다. 아니, 뻗지 못했다. 모든 생물이 본능적으로 아는 것 중 하나가 힘의 차이였다. 그가 다나에게 손을 댄다면 뼈마디 하나하나가 으스러지리라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콧잔등을 찌푸리고 낮게 그르렁거리는 모습에 기꺼이 곁에 둘 마음이 든 다나는, 누군가의 핏방울이 튄 손을 혼혈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따라와. 갈 데도 없을 테니. 까끌까끌한 혀가 관능적으로 손가락을 핥아왔다. 옳지, 착하다. 다나는 천천히 그의 목에 손을 뻗었다. 끊겨 짧아진 사슬이 달린 목줄에 엷은 녹이 슬어 있었다. 다나는 한 손으로 구속용 목걸이를 으스러뜨려 끊어냈다. 손길에도 가만히 있던 그가 일순 숨을 들이켰는데, 선뜩한 쇠 때문인지 다나의 힘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얌전히 타. 다나가 말했다. 단순히 다른 파의 거래를 방해하는 게 주목적이었던 다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
이름이 뭐지? 알아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다나였건만, 반대쪽 벽에 등을 붙이고 있던 혼혈은 그의 기대를 제대로 깼다. 염호. 목소리도 억양도 영락없는 인간이었다. 순간 다부진 생김새를 잊어버릴 만큼 부드럽기까지 했다. 말을 할 줄 아네? 널널한 바지춤에 아무렇게나 손을 찔러 넣고 있던 염호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인간처럼 구는 건 싫어하시나? 떠보는 말투였다. 다나는 대답 대신 담배 끝에서 재를 털었다. 뭐, 내 취향은 아니네. 염호가 벽에서 몸을 뗐다. 그럼 좋으실 대로. 담배를 쥐지 않은 손등에 입술이 닿았다. 생각보다 더 재밌는 걸 주웠군. 다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한 손으로 그의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염호는 목울대를 움직이며 침을 삼켰다. 안광이 없던 왼쪽 눈은 무엇에 당했는지 비스듬하게 베여 있었다. 이제 다나의 손길에는 익숙해져야 할 터였다. 다나는 일부러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흉하게 아문 상처 끝을 매만졌다. 아문지 꽤 되어 보였다. 누가 이랬지? 글쎄, 이제 기억도 안 나. 호박색 눈동자가 시선을 피해 굴렀다. 인간인가? 대답 대신 머리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다나는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염호를 지그시 바라보다 손을 떼 주었다. 다시 허리를 편 염호가 재빨리 눈을 앞머리로 가렸다. 불편하지 않나? 염호는 고개를 저었다. 다나는 왠지 모르게 끌려 올라가는 입가를 손으로 슬쩍 가렸다. 만족과 희열이 섞인 눈빛이 집요하게 염호의 앞머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육감인가? 주어를 빼놓은 질문이었다. 염호는 간단한 대답으로 긍정했다. 뒷목을 반쯤 덮는 길이인 머리가 흘러내려 옆얼굴을 가렸다. 줄무늬가 선명한 머리칼 끝에 묻은 피가 굳어있었다. 가지고 태어난 거겠지? 완전히 호기심이 동한 다나는 염호를 보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염호는 그 질문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힘의 우위를 분명하게 점한 사람을 당신이라고 칭하는 게 영 찝찝한듯했지만, 다나는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렇지, 마찬가지지. 염호는 먼지가 뿌옇게 쌓인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새 날이 바뀐 건지 짧은 바늘이 다섯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막 해가 떠오를 시간이었으니 지친 몸이 천천히 무거워지는 것도 이해가 됐다. 방해가 됐나 보군. 쉬고 있어. 다나가 발을 옮겼다. 서너 평 남짓한 이 곳을 방으로 줄 작정인 모양이었다.
녹슨 문을 막 열려던 다나가 잠시 멈춰 섰다.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라. 난 네가 마음에 들거든. 닫힌 문 뒤로 차가운 공기가 남았다. 핏물에 딱딱하게 굳은 머리칼을 만져보던 염호가 실소를 담아 짧은 숨을 뱉었다. 도망칠 생각은커녕 일말의 답답함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 흔히 느낄 불안이나 당혹감, 아니면 다나의 태도에 대한 일말의 분노 같은 것도 없었다. 다나는 뭐랄까, 염호가 태어나서 처음 만나본 부류였다.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그동안 자신을 사고팔기에 여념이 없던 연약한 족속들과는 차원이 다른 누군가. 그래서 염호는 그 방에 얌전히 있었다. 다나가 그를 다시 찾아온 것은 딱 사흘이 지난 뒤였다.
***
웬만한 사람이라면 불법의 증거들이 가득한 트럭에 함께 실려 가던 염호를 발견할 순 없었을 것이고, 흉포한 혼혈을 묶지 않고 데려가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을 터다. 뒷세계를 주름잡는 모 파벌들 중 하나의 보스였던 다나는, 살기가 형형한 겉모습을 소재로 만들어진 소문과 달리 유능하고 인정도 많은 편이었다. 뒷세계 사람들이 그렇듯 때에 따라선 잔혹했지만 철저히 선을 지켰다. 특별한 악취미도 없었다. 그러나 다나와 대립하던 파벌의 보스는 악명이 높은 혼혈 수집가여서, 새 거래를 개시하며 혼혈 한 명을 선물로 받은 모양이었다.
염호는 수집가들이 가치를 높이 쳐주는 수집품 중 하나였다. 다부진 몸도 흉터도 값어치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첫 기억은 목을 옥죈 사슬 목줄과 검은 철창이었고, 언젠가 그 철창을 찢고 나왔을 때부터는 가시가 돋은 창들이 겹겹이 그를 에워쌌다. 간혹 사람 같은 모습을 보이면 채찍이 날아왔다. 예외인 주인은 지금껏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한동안 맹수를 흉내 내며 살았다. 주인이라는 작자의 숨통을 끊는 꿈을 얼마나 꿨는지, 이젠 세기를 포기한 지경이었다.
화물칸이 아닌 좌석에 앉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잠시 뒤 나타난 다나가 익숙하게 뒷좌석에 앉았다. 안심해라. 투견에는 흥미 없으니까. 참 빨리도 말해준다 싶었다. 성에 차는 놈을 그동안 못 찾고 있었어서 말이야. 그런데 너는... 볼수록 마음에 들어. 목적이 빠져있었지만, 염호는 감사의 뜻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타이밍 좋게 차가 섰다. 들이쉰 공기에 매캐한 담배 연기와 아주 희미한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일자로 정렬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다나는 익숙하게 그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시답잖은 것들이 보내는 적대감을 가볍게 무시한 염호는 다나의 뒤를 따라갔다. 이곳이 조직의 아지트라는 것은 눈 감고도 알 수 있었다. 다나는 안쪽 방까지 염호를 들이더니, 뒤따라오던 사람들을 전부 물렸다.
원하는 게 뭐지? 문이 닫히자마자 염호가 물었다. 다나는 대답을 미루고 제자리에 앉았다. 희미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 담배 연기가 섞인 방의 공기에 염호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거기 앉아. 싫으면 서 있던가. 서두를 게 없다는 듯, 다나는 느릿느릿 담배에 불을 붙였다. 피워봤나? 염호는 거절했다.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고개를 끄덕이자 살짝 헝클어진 옆머리가 따라서 흔들렸다. 다나는 빨아들인 연기를 천천히 뱉었다. 답을 쉽게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목줄 차 볼 생각 없어? 장난기를 섞긴 했지만 진심이 없지는 않았다. 호박색 안광에 경계심이 더해졌다. 다나는 조용히 웃으며 담배 끝을 털었다. 동업이라고 해야 하나, 뭐든. 말했지만 난 네가 마음에 들거든. 염호는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조직에 들어와. 험하게 쓰는 일은 없을 거다. 약속하지. 어느새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빠져 있었다. 염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험하게 쓰다. 그 말이 붙는 대상이 사람이었던가, 그는 생각했다. 잠시 떨구었던 시선을 들어 다나를 보자, 힘으로 한 번에 굴복시킬 수도, 어쩌면 죽일 수도 있는 염호의 입술만을 바라보고 있는 다나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이지 이상한 사람이었다. 어차피 거절할 여지는 없었다. 염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기껏 데리고 왔는데 험하게 써야 하는 거 아닌가? 다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불편하다는 표정이었다. 염호는 재빨리 질문을 바꿨다. 험하게 쓰지 않는다는 건 무슨 말이지? 다나가 담배를 지져 껐다. 말 그대로다. 네 손을 괜히 더럽히진 않아. 외로운 거면 그냥 첩을 앉히지. 비아냥거림을 다나는 수월하게 받아쳤다. 취향이 그쪽인가? 어쩌면 진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염호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딱히 쓸데가 없을 텐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다나가 피식 웃었다.
상관없어. 그냥 이기심이니까. 다나가 지포 라이터 뚜껑을 열었다가 탁 닫았다. 뭐, 애들이 시원찮은 것도 있고, 귀찮은 일이 많은 것도 있고... 넌 그냥 적당히 내 옆에 있어주면 돼. 심심하면 애완동물 노릇을 해도 되고.
너무나 당당하고도 가벼운 말투였다. 염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싫다면? 물론 거절할 여지는 없었다. 지포라이터를 여닫는 소리가 몇 번 이어졌다. 다나는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싫을 리가 없는데. 선뜩하게 날이 서 있었다. 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어디 있을까?? 호박색 안광이 다나의 시선과 맞부딪혔다. 인간의 것과 다른 점이 없는 핏빛 눈동자는 염호보다 몇 배는 더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염호는 괜히 송곳니를 꽉 물었다. 다나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염호의 방은 그날부로 바뀌었다.
***
말씀도 없이, 좀 섭하네요. 딜러라는 정체불명의 이름으로 뒷세계에 발을 담근지 오래라던, 실실 웃는 낯짝이 영 미덥지 못한 사람이었다. 다나의 조직과 제법 오래 거래를 해온 사람이라는 것 같았다. 용건이 뭔가? 시선이 재빠르게 염호를 훑었다. 그 찰나를 알아챈 다나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서 딜러를 쳐다보았다. 내가 좀 바쁜 사람이라. 후덕한 체형인 그가 양손을 삭삭 비볐다. 뭐, 굳이 물리실 필요까진 없으니까... 그런 쪽에 관심이 있으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라서요. 미리 언질을 주셨으면 좋아하실 만한 애들로 몇 골라서 데려왔을 텐데... 언제 한번 투견장이라도 갔다 오지요. 어쨌든, 요새 혼혈 구하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뭐, 가끔 말단 몇 명만 빌려주시면 보답은 제대로,
유리로 된 재떨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다나의 손에서 날아갔으니 제 모양을 유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 새끼가, 늙어 뒤져도 조용히 뒤져야지. 그래도 돈줄이라고 힘을 아낀 게 저 정도였다. 떨어지는 피에 놀랐는지 딜러가 겨우 벽을 짚었다. 그딴 추잡한 짓 들이밀 거면 어디 한 군데 박살 날 준비는 해. 염호는 그 인간을 힐끗 보았다. 어깨를 덜덜 떠는 것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딜러는 피 몇 방울을 떨어뜨려 놓은 채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다나가 방 안에 있던 다른 조직원들을 모두 물렸다.
별 이상한 놈들이 다 붙네. 짧아진 담배를 바닥에 던진 다나가 뇌까렸다. 염호는 다나의 자리 뒤에서 그런 다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힘을 가진 사람은 굳이 그가 지켜주지 않아도 되었다. 투견으로도, 장식품으로도 쓰지 않을 거라면 대체 다나는 그를 왜 데리고 있는지. 염호는 묻어두었던 의구심을 다시 키워가며 점점 화가 풀려가는 다나의 표정을 가만 보고 있었다. 새 담배를 찾아 손을 뻗던 다나가 염호를 올려다보았다.
불. 짧은 단어에 염호가 바로 반응했다. 늘 다나가 가지고 다니던 지포 라이터는 이제 염호의 손에 있었다. 듣기로는 전대 보스의 취향이라고 했다. 다나는 제 옆으로 고개를 숙여 불을 붙이던 염호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가볍게 감쌌다. 네가 특별하니까 데려온 거다. 그러니까 너 말고 다른 건 안 돼. 나직한 말에 염호는 문득 실감이 났다. 선뜩하게 목에 얹힌 이해한다는 말, 그러니까 그것은 다나가 그를 동류로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 유일한 동류이리라. 쇳덩어리를 한 손으로 으스러뜨리는 힘이 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느릿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염호의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까칠한 입술이 살짝 벌어진 입에 맞닿았다. 나른하고 농밀한, 어쩌면 입술이 떨어진 후에는 아쉬워하게 될 것 같은. 지금껏 다나에게서 받아온 느낌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 뜨거운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
다나에게는 유능한 부하가 제법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것들이야 그의 눈에 담긴 살기나 무력을 보고 따랐겠지만 다나에게 신뢰를 받는 사람들은 달랐다. 다나가 확실히 인간임에도, 그 신뢰받는 부하들 중 순혈인 인간은 없었다. 그가 인간과 혼혈을 전혀 가리지 않는 점도 충분히 한몫을 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유능하고 강한 귀능은 다나와 얽힌 게 아주 많은 사람이었다. 밤바다를 넘어 막 돌아온 그는 생경한 다나의 모습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적어도 그가 아는 다나는 저런 짓을 즐길 사람이 아니었다.
경호라도 하듯 서있는 건 다부진 호랑이 혼혈이었다. 눈은 주황색과 검은색이 섞인 머리칼 사이에 가려져 있었지만, 형형한 안광은 귀능의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염호, 그렇게 긴장할 것 없어. 오래 봐온 애니까. 보스의 말 한마디에 염호라는 자가 살기를 갈무리했다. 잿빛 사슬로 된 목줄이 공중에서 쩔렁거렸다. 그 소리와 겹쳐 반갑지 않은 장면이 머리를 스쳤다. 무슨 생각이 있으시겠지. 귀능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번에 새로 들였다. 쓸 만한 애들은 다 네가 빼 가 버리니 어디 마음이 놓여야지. 차가운 밤 공기에 살짝 쉰 귀능의 목소리가 떨떠름했다. 연락은 왜 안 하셨습니까. 다나는 자랑하듯 손에 쥔 목줄 끝을 흔들어 보였다. 얘를 주워서. 염호라는 남자는 저를 두고 하는 말을 듣고 있긴 한 건지, 속내는커녕 시선의 방향조차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최소한 귀능과는 비등한 상대였다. 수고했다. 다른 용건 있나? 보고를 막 끝낸 귀능이 염호에게 정신을 팔고 있을 무렵이었다. 귀능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방에서 재빠르게 나와 생각에 잠겼다. 어딘가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기분 탓이겠지. 귀능은 생각했다.
오셨습니까. 한때는 어린 귀능을 깔보던 무리였다. 지금은 겉으로나마 충족한 수족 노릇을 하고 있지만. 귀능이 겉옷을 대충 벗어 곁에 뒀다. 불까지 붙여 내밀어온 담배를 가볍게 빨아들였다. 내가 없으니 다들 기를 폈겠군. 묘하게 살이 오른 얼굴들을 쳐다보며 귀능은 생각했다. 귀능의 옆에서 가장 시중에 열심이던 누군가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아, 들으셨습니까? 보스가... 보스가 뭐. 그도 모르게 목소리에 날이 섰다. 귀능에게 다나란 곧 하나뿐인 가족이자, 선배이자, 은인이었으니까. 그래서 온 몸을 바쳐 따르는 걸지도 몰랐다. 귀능에게 먼저 말을 건 사람은 잠시 꼬리를 내리는 듯하더니, 다시 설설 기며 어떻게든 귀능의 관심을 돌려보려 안달이었다. 귀능이 반쯤 태운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혀 뽑아줄까? 세게 엄포를 놓았다. 긴 말 들어주기 귀찮으니 제대로 말하라는 뜻이었다.
보스가 요새 좀... 이상하시답니다. 보셨겠지만 그 호랑이 같은 놈을 데려온 뒤로부터요. 가끔은 잘 보이시지도 않고요. 다른 뜻이 아니고, 요새 또 다른 파 녀석들이 슬슬 보이는 게...
그만하지. 끝맺음보다 귀능의 손이 더 빨랐다. 둔탁한 소리가 방을 울렸다. 그의 비위를 맞추던 조직원들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벽에 부딪힌 채 몸을 비트는 모양새를 잠깐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일어나 방을 나왔다. 그가 타고 갈 배는 세 시간 뒤에 들어올 예정이었다. 괜히 기분이 찜찜해져 욕지거리를 뱉는 그였다. 그냥 기우겠지. 지친 눈으로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는 생각했다.
***
피곤한데. 이만 갈까. 생기 없는 눈빛이 염호를 향했다. 방금 건장한 성인 스무 명을 문자 그대로 으스러뜨린 사람이 내뱉은 말이었다. 분이 좀 풀렸는지 광견같던 눈빛을 거둔 다나의 앞에는 곤죽이 된 무엇이, 그의 뒤에는 두려움에 몸이 굳은 산 사람들이 가득했다. 피 냄새와 비명이 채웠던 허공에는 살얼음 같은 무엇만 남아있었다.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뒤틀린 팔에 이어진 손바닥에 염호의 눈길이 닿았다. 인간의 것이었다.
피곤해 보이지는 않았다. 지루하거나, 어쩌면 질렸거나. 물론 그런 것에 상관없이 염호는 다나의 말에 따라야 했다. 내일까지 찾지 마라. 염호가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다나를 따라나온 그는 다나가 꺼내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온 지 1년이 다 되어가니 이제는 지극히 익숙해진 행동이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네. 염호의 눈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다나가 말했다. 염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말고. 그렇게 말하며 다나는 염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둘을 실은 차에 시동이 걸렸다. 염호가 처음 다나를 만났을 때도 이 차를 타고 왔었다. 그는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도시가 잠에 들어 고요할 시간이었다. 염호는 차창에 머리를 살짝 기댔다.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
삼킬 듯 붙어온 입안은 여전히 뜨겁고 비릿했다. 정작 입에는 피가 닿지 않았을 테지만, 적나라한 광경을 보고 온 탓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거라고 염호는 생각했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염호는 이불을 찾아 손을 뻗었지만 닿는 게 없었다. 잔뜩 구겨져 밀린 이불은 이미 떨어진 지 오래였다. 아쉬운 대로 고개를 돌린 그는 다나의 손톱자국이 남은 제 팔을 힐끗 보았다. 아픔에는 더욱 무뎌진 것 같았다. 땀에 살짝 젖은 이마를 염호의 배에 비비던 다나가 짧게 흠, 하는 소리를 흘렸다. 만족스럽다는 뜻이었다. 염호는 손으로 다나의 어깨를 감쌌다. 이번에는 서로의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떨어졌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나가 그에게 손을 내민 걸지도 몰랐다. 어떻게 보일지 알면서도 굳이 목줄을 채워 놓은 것 또한 그의 은밀한 취향일지도. 코끝에 남은 담배 냄새를 습관적으로 쫓던 염호는 다나의 손짓에 재빨리 협탁에 놓여있던 재떨이를 건넸다. 그간 일어난 모든 일, 그러니까 경찰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조직의 보스에게 숨통을 잡히고, 몸까지 섞는 관계가 된 것을 염호는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행운의 의미와 같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나에게 기꺼이 동조한 것은 그였으므로. 풀려날 기회가 있었다는 것을 알기에 염호는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다나가 후회할 틈이 없도록 대우해주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랑해, 너는 말하지 마. 그 말을 처음 들었던 것도 금방이었다. 다나가 그렇게 말했을 때 뜨거운 손바닥이 염호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다른 손으로는 아마 왼쪽 눈꺼풀에 새겨진 흉터를 천천히 따라가고 있었을 것이다. 짙은 커튼 사이로 들어오던 오전의 햇살을 염호는 기억하고 있었다. 다나는 그때부터 부쩍 염호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졌던 것 같다. 염호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시도때도없이 담배냄새가 짙게 밴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은 다나가 아닌 그였으니까. 염호는 한 손으로 이불을 주워올려 덮었다. 다나가 곁을 파고들자, 그는 군데군데 붉어진 팔을 머리 밑에 대주었다. 뜨겁네. 다나가 말했다. 다나가 먼저 말을 걸었을 때만 염호는 말을 했다. 암묵적인 계약이자 다나가 염호에게 가장 만족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체온이 높으니까. 그건 다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눈을 반쯤 감고 손끝으로 염호의 몸에 진 흉터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던 다나가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는데, 아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고 했다. 혼혈 한 번 욕보였다고 해서,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을 형체도 안 남을 때까지 뭉개 놓을 것 까지는 없다고. 다 죽여버릴 필요가 없었다고. 갓 어른이나 되었을까 싶은 말단 조직원을 발길질 한번에 죽여서는 더더욱 안 됐다고. 염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어느새 입술이 마른 것 같았다. 숨겨두지 말고 말해. 다나가 몸을 일으켰다. 기분 나빠지기 전에. 얼굴이 가까워지자 비릿한 냄새가 났다.
염호는 입을 열었다. 방금 생각했던 것들을 확실하면서도 간결하게 말했다. 다나는 팔을 뻗어 불을 껐다. 그래 봤자 둘 다 밤눈이 밝았다. 염호의 말이 끝나자 긴 침묵이 이어졌다. 다나는 가벼운 손짓으로 염호를 제 옆에 눕혔다. 거칠고 가는 손가락이 염호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그렇게 생각했어? 어르는 것을 흉내낸 말투였을까. 염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나는 나른한 듯 천천히 팔을 움직여 그를 감싸 안았다. 넌 그냥 신경 쓰지 마. 다시 몸을 일으킨 다나가 입술을 맞대왔다. 요새 다나는 부쩍 다정한 모습에 싫증을 냈다.
다나는 어느새 옆에서 곯아떨어져 있었다. 적나라했던 광경 탓인지 염호는 잠을 설쳤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하늘은 밝아지려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해를 보려면 몇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봤자 늘 커튼을 쳐두는 다나의 방에는 별 의미가 없겠지만. 하루쯤 해가 뜨지 않아도 좋을 텐데. 염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
귀능은 부쩍 거칠어진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육지를 밟자마자 잠재워놓은 욕지기가 다시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가뜩이나 그를 몰아치는 상황 때문인지도 몰랐다. 귀능을 마중하러 나온 사람이 연신 굽실거리며 그를 차로 안내했다. 도착하고 나서도 다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나의 부재가 귀능에게는 영 낯설었지만, 다른 조직원들은 별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몇 명이라고? 스무 명요. 네 명은 말단이었는데... 똑똑히 듣고도 믿기지 않아 되물었다. 이거 원, 미친 왕이 따로 없군. 소문의 주인공이 다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는 그렇게 가볍게 내뱉었을 것이다.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 귀능은 그 뒤로 오랫동안 연기만 뱉었다. 예의범절보다는 싸움을 먼저 배운 그였으니, 조직은 그의 가족과도 같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고개를 기울여 한 손으로 이마를 짚는 그였다. 시차 때문인지, 피곤이 두통이 되어 머리 한구석을 눌렀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새 담배를 찾았다. 애들 불러봐라. 광이 나는 지포라이터를 만지작거리던 귀능이 내리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한기를 품은 새벽 공기가 작디작은 창문을 넘어 귀능의 곁까지 들어왔다.
***
소란스럽네. 다나가 말했다. 염호는 목 안쪽을 살짝 긁어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제 둘이 있을 때도 목소리를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다나였다. 은밀한 움직임이었지만, 일반인의 범주를 가볍게 넘어선 둘은 웬만한 기척은 알아챌 수 있었다. 철컥, 하는 작은 소리에 염호가 귀를 움직였다. 분명 부주의한 누군가가 권총을 뒤늦게 장전하는 소리였다. 적대감에 신경이 곤두섰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그를 다나가 막았다.
그냥 들어오게 놔둬. 염호는 일어서려던 움직임을 멈췄다. 다시 침대로 들어가자 다나가 베고 있던 자리에 똑같이 머리를 뒀다. 이 짓, 오래는 못 해먹겠단 말이야. 아무런 대답도 바라지 않는 말이었다. 염호는 다나의 검은 머리칼에 손을 얹어 천천히 쓸어내렸다. 귀능이 그 녀석은... 나보단 잘하겠지. 똑똑한 녀석이니까. 염호가 귀능을 경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다나의 볼에 손을 올렸다. 오늘따라 몸이 찼다.
그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다나는 지금쯤 어땠을까. 순간 떠오른 의구심이었다. 다나는 자신의 자리의 대가를 조용히 받아들였어야 했다. 비록 그 대가로 잃는 것이 마지막 인간성이더라도. 초조했던 다나는 동류라는 이름에 염호는 물론 그 자신까지 얽어맨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만약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다나는 지금보다 확실히 괜찮았을 것이다. 그의 자리는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열성적인 혼혈 수집가로 변모해 염호와 만났을 수도 있었다. 물론 지금 따져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를 곁에 둔 건 오로지 다나의 과욕이었다. 몸을 반 바퀴 굴린 다나가 작게 틀어둔 음악 소리를 키웠다. 생채기 하나 없는 깨끗한 등은 조직 보스의 것이라기에는 퍽 가냘파 보였다.
내 목, 조를 수 있지? 저것들보다 먼저. 다시 염호의 허벅지 위로 돌아온 다나가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염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가오는 발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사랑해. 다나가 키스했다. 송곳니에 긁혔는지 비릿한 피 냄새가 감돌았다. 어쩌면 다나에게서, 또 어쩌면 그에게서 나는 냄새인지도 몰랐다.
VI
장르: 타임루프물
<그 때로 돌아가는 것은>
뚜뚜(트위터 @dduddu_06)
“서장님, 경찰 측에서 대규모 납치사건 현장을 검거했다고 합니다. 일단 현장에 저희 측 특기자 둘을 보냈습니다.”
“좋아, 다수의 특기자가 존재할 수 있으니 신중하게 움직이라고 전해. 우리도 가자, 준비해.”
사건은 규모가 꽤나 컸음에도 그 해결이 예상보다 빨랐다. 다나가 사건이 종결된 후 이번에는 꼭 염호와 술잔을 기울이겠노라고 결심한 것도 이 덕분이었다. 다나는 현장을 검거하러 가는 한 히어로조직의 수장 치고는 꽤 가벼운 걸음걸이로 걸었다.
얼마 후,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귀능의 다급한 현장보고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귀능은 질겁한 얼굴로 제 서장에게 ‘현장에 수십 명의 특기자가 매복해있었다. 이로 인해 경찰이 큰 피해를 입었다.’ 라는 보고를 남겼다. 다나는 경찰을 먼저 보내면 안 됐다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서둘러 가자는 말을 전하려 했으나 다나의 입술은 어느 말도 내뱉지 못하고 꾹 닫혀버렸다. 눈앞이 흐려짐을 느끼며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나의 지독한 타임루프가 시작되었다.
*
“...저기요, 서장님?”
“...어?”
“듣고 계세요? 저희 측에서 현장에 특기자 둘을 보냈다니까요.”
깨어나자마자 마주친 귀능이 꽤나 평온한 얼굴로 의외의 보고를 하자 가장 먼저 시계를 확인했다. 시곗바늘은 방금 전의 시각보다 한참 전의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과거의 선택을 뒤바꿀 수 있는 때로 돌아왔음을 바로 깨달았다. 시간을 되돌린 사람은 먼저 현장에 파견된 특기자겠지.
당혹감을 뒤로 하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부터 떠올렸다. 타임루프의 이유를 알아내는 것은 뒷전으로 미루고 그저 이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보고를 마치고 서장실을 나서는 귀능을 붙잡고는 말했다.
지금 당장 현장으로 가자.
스푼은 현장에 빠르게 도착해 손쉽게 특기자들을 제압했고, 경찰과 피해자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근데, 염호는? 무사히 현장을 빠져나온 인원들 중 염호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몇번이고 같은 시간으로 되돌아가도 염호는 무사히 현장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같은 시간을 수십번은 경험한 후 겨우 깨달았다. 염호가 동시간에 예외 없이 죽는 이유는 범조직의 특기자의 특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무리 시간을 되돌아가도 한 사람만은 살릴 수 없다는 것을. 밭은 숨이 지쳐버린 마음을 찌르는 듯 했다. 염호를 구해주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지독한 무력감을 느낀 것이었다. 또 다시 흐릿해지는 눈앞을 뒤로하고 나는 더 이상 염호를 살리지 않겠다고, 할 수 없는 일에 무모히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
더 이상 시간이 되돌아가게 두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고 난 후 타임루프가 되었을 때, 난 제일 먼저 염호를 찾았다.
“...너 오늘 죽어.”
‘...너한테?’
“아니 ㅆ... 야,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
“우리 측 특기자가 널 살리려고 계속 시간을 되돌렸나봐. 그래서 나도 몇 번이고 널 구해보려고 했는데...그게 그렇게 안 되더라... 미안.”
‘...그래?’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인가보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염호의 목소리는 자신의 죽음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평온했다. 염호는 제 죽음을 남의 것인 마냥 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시간이 몇 번이고 돌아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으나 나는 염호 한 사람을 살리지 못했음을 자책했다. 그에 반해 염호는 다른 사람들이 무사하면 됐다며 되려 웃었다. 분했다. 뭐가 그렇게 간단한 건데, 넌. 온갖 쓴 소리를 내뱉고 싶었다. 목이 메는 바람에 쓴 소리를 하긴 커녕 염호의 힘 빠지는 소리나 잔뜩 들어버렸지만 말이다.
야, 난 이기적이라 그 수많은 사람들보다 너 한명이 더 중요해. 차라리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하라고.
-
나는 또 다시 사람들을 구했고, 염호는 또 다시 무사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끔찍했다. 마음을 굳게 먹었음에도 그의 마지막 모습조차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두려워서, 다시 한 번 시간이 되돌아갔으면 싶었다.
“이제 그만두자, 수십 번도 더 노력했지만 염호는 살릴 수 없었어.”
“...서장님이라면 어떻게든 해주실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턱을 따라 굵은 핏줄기를 흘려보내는 직원이 곁에 와 앉았다. 이대로 염호서장님을 보내드릴 순 없어요. 서장님도 그렇잖아요? 시간을 무리하게 되돌린 부하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한 번이라도 더 시간을 돌려보겠다며 매달렸다.
글쎄 있잖아, 나도 그러고 싶다. 근데, 그게 안 되는데 어쩌란 말이야.
*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 아래, 모두가 제 위치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다나는 숨을 깊게 들이켜며 말했다. 더 이상 사망자는 없고? 부하들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 다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신이 내뱉은 질문을 스스로 우습다 여긴 것이었다. 수십 번의 반복 속에서 다나가 살리지 못한 사람은 오직 단 한 사람이었기에. 다나는 머리끝까지 흰 천을 덮고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단 한 사람의 옆에 서서 전해지지 못할 말들을 속삭였다.
“그 새끼는 꼭 내가 잡을 거다. 그리고, 미안해. 살려주지 못해서.”
“...”
“...좋아한다고 말이라도 해볼 걸.”
다나는 그를 살리는 것을 실패한 수많은 시간에 미련이 남은 듯 꼭 잡은 염호의 손이 차게 식을 때까지 공터 한 켠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오늘따라 경찰서장님께서 불안해보이시더라고요. 이곳저곳에 전화도 여럿하시고...”
“...”
“이런 말은 해선 안 될 것 같지만, 이미... 알고 계셨던 것 아닐까요.”
“...난 들어가 본다.”
내 앞에선 하나도 두렵지 않은 척 했으면서. 네 부하의 말, 그냥 듣지 말걸 그랬어.
VII
장르: 청춘
<Corokia>
녹차(트위터 @Tea_icegreen)
코로키아를 아는가? 적절한 햇빛과 선선한 바람이 제게 닿아야지만 잎을 가진 채로 자라나는 식물이다. 바람이 저를 스치지 않거나 햇빛을 만나지 못하면 금세 제 잎을 떨어트리는 식물, 우리의 상태는 그러했다. 처음에는 어려운지도 몰랐다. 넘치게 주어도 상대에게는 딱 맞는 햇빛이었고 아무리 불화가 이어져도 결국에는 잎을 살랑이게 만드는 정도의 바람일 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지금 이 암막이 어색했으며 거세게 부는 바람은 더없이 위험했다. 특별을 평범으로 착각해 지내다 뒤늦게 찾아온 평범은, 우리에겐 특별이었다. 시간을 돌리는 기계라도 있다면 무엇을 주어서도 돌리고 싶은 후회가 저를 좀먹었고 웃고 있음에도 흐르는 눈물은 터진 둑에서 흐르는 얇은 물줄기 같았다.
**
시작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나의 휴대폰에서 끊어도 끊어도 같은 번호로 오는 전화. 염호는 평소처럼 넘기려 했다. 다나는 인기가 많았고, 이끌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성격이었으니 매번 걸려오는 전화는 친구, 혹은 어쭙잖은 수작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쌓이는 부재중과 수십 통씩 밀려오는 문자는 일상이었고 제 안에 차오르는 울컥거림을 염호는 애써 익숙한 척 삼켜냈다.
저를 향한 다나의 사랑을 알았고, 다나를 향한 제 믿음을 알았으니 별 오해할 것도 없었다. 걸려오는 전화마다 누구인지 말해주고 자신이 가끔가다 믿지 못하면 직접 전화해보라며 핸드폰을 건네주기까지 했으니 못 믿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다만 이번에는 다나가 제게 계속해서 오는 전화의 상대를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면 그래, 개인 사정은 개인이 해결할 일이니 내버려 두었을 거다. 그러나 이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일주일, 지긋지긋하게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 그 전화를 누군지 말해주지도 않는 다나.
다나는 전화가 올 때마다 눈동자를 작게 굴려 자신을 보고는 끊으려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지만 무슨 소용인가, 끊어도 계속 오는데. 그걸 자신이 모르는 것도 아니고 계속되는 행동은 꽤 인내심이 큰 편에 속하는 자신의 화를 이끌었고, 그 화는 또다시 전화를 끊으려는 다나의 손목을 붙잡는 것으로 이어졌다.
"다나, 일주일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 동안 지긋지긋한 새끼한테 전화가 왔고 너는 일주일 동안 내 눈치 보면서 전화를 끊었어."
읊조리듯 건넨 염호의 말에 이어진 다나의 답은 침묵이었다. 타오르던 불에 물은 커녕 기름을 붓는 무거운 침묵.
"빚이라도 있어? 아니면 어떤 새끼가 겁대가리도 없이 널 따라다니는데 툭 건드리면 뒤질 새끼야?"
"빚은 아니야, 앞으로도 없을테고. 그냥... 그냥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거야. 별 다른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거야. 신경 쓰지 마."
"너 같으면 신경 쓰지 않는 게 되겠, 아니 날 못 믿어?"
"그런 거 아니라고. 왜 말이 그딴 곳으로 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내뱉기만 하면 될 말들이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들은 모두 제 목에서 막혀 나오지도 못하는 먹먹한 말들, 감정만 가득 섞여 둘에게도 좋지 않을 말들이었고 염호는 그 말을 하는 대신 두려움에 감싸져 이번에도 가리는 걸 택했다.
"...야, 너 설마 나 못 믿냐? 금방 해결할 수 있어. 잠깐만 신경 안 쓰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고."
어떻게 내가 너에게 믿지 못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멀어지는 게 두렵다. 벽이 생기는 것도 두렵고, 벽 너머의 너도 두렵다. 내가 여기서 내 마음을 말한다면 우리는 멀어지겠지. 고민은 침묵을 낳고, 침묵은 불신을 만들기도 한다.
염호의 침묵은 다나에게는 불신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염호에게도 다나의 불신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기에 다나는 펴져 있던 미간을 구긴 채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나 자신도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떻게 될지 몰랐으니 제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낮게 읊조렸다.
"시간을, 시간을 갖자. 너 지금 나 못 믿잖아. 다 해결하고 연락할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았나, 아니면 기대하지도 않았나 차 문을 여는 움직임에는 망설임은 없었고 걸음걸이는 빠르기만 했다. 염호가 미처 잡을 세도 없게 말이다.
유리창 건너 앞에서 걸어가는 다나가 보였으니 지금이라도 달려가면 잡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염호가 할 수수 있는 건 그저 거친 숨을 내쉬며 빠르게 걸어가는 다나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다나는 제 말을 후회하는 일이 없었고, 제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지금 또한 별다르지는 않을 테니, 제가 잡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은 더없이 확실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잡아봤자 소용조차 없을 거라 염호는 확신한 채 제 확신에 수용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래, 그랬을 뿐이다.
**
그 뒤로 일주일이 또다시 지났다. 물론 긴 시간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그저 눈을 감았다 뜨니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등의 느낌도 느꼈을 정도로 시간이 빨리 갔기에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나 보다.
일주일 동안 염호는 다나에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지 못했다. 다나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나온 행동이었고, 그렇게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동안에 염호는 방 안에서 벗어나지를 않았다. 암막 커튼은 햇빛을 가렸으며 열리지 않는 문은 바람조차 들어오지 못했다.
휴대폰은 시끄럽게 울려댔지만 기대 한 줌을 쥐고 있는 사람이 있었기에 꺼놓지도 못했다. 누가 보면 어리석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짓이었지만 계속해서 자신을 찾는 전화는 이름만 보고서 넘기고, 문자 또한 잔뜩 쌓인 후에야 확인하는 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에 염호가 하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몇 번은 제집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초인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댔지만, 방에 가만히 박혀 답도 하지 않으니 물러갔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 중 너는 없었다. 내가 기대하고, 기도하는 너는 없었다.
"...미친 새끼,"
그 말은 하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평소처럼 넘기면 됐을 텐데 왜 그걸 굳이 말했을까.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특별하게 평범한 너와 함께 했을 텐데.
거친 숨을 내쉬며 염호는 이불에 제 얼굴을 깊게 받았다. 공기조차 잘 들어오지 않아 흠뻑 들이마셔야 겨우 마셔지는 공기는 불편했지만 그걸 신경 쓸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특별을 평범으로 착각한 자신은 항상 떠 있던 늪의 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후회는 또 다른 후회를 만든다. 모든 후회는 절대 좋은 결과를 만들지 않았고 그런 후회에 염호가 빠져들었을 무렵, 메시지 알림이 휴대폰에서 울렸다. 띠링-, 하는 다른 메시지 알림과 달리 띵-, 하는 알림 소리는 문자를 읽지 않는 자신에게 빨리 좀 읽으라며 설정해준 것이었다.
다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잡느라 이불에 걸려 넘어질 것 같았지만 그건 지금 염호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다나
[ 다 정리했어. ] - PM 15:03
[ 네 집 근처야, 할 얘기 많아. ] - PM 15:08
더없이 간단한 내용이 네가 보냈다는 것을 알려줬고 문자가 온 시간을 살피자 2시간 전쯤에 온 메시지였다. 너무 한꺼번에 메시지가 많이 와 오류가 생긴 건지, 아니면 다른 메시지들에 밀려 인제야 알림이 온 건지 모르겠지만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고 맨발로 운동화에 발을 끼워 넣었다.
반소매에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상관할 바는 되지 못했다. 현관 밑으로 내려가서야 비가 온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가지러 올라갈 바에는 늦었을 너에게 가는 게 우선이었기에 거칠게 내려오는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고서 집 근처 골목으로 들어갔다.
매일 너와 만나던 곳이었으니 염호의 발걸음에 멈춤은 없었다. 오히려 가빠지는 호흡과 달리 발걸음은 뜀박질로 바뀌었고 골목 코너를 돌았을 때 검은 우산을 쓴 채 서 있는 익숙한 다나가 보였다. 다나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제야 숨을 고르려 염호는 벽에 손을 올렸고 인기척에 돌아본 다나는 염호를 보자 우산을 팽개치고는 염호에게 다가갔다.
"야, 야 지금 비가 얼마나 오는 데 우산도 안 쓰고 뛰어올 생각을 해."
젖은 염호의 머리카락을 넘기고자 얼굴을 쓸던 다나의 손은 이마에 다다르자 놀라 손을 뗐다.
"열나잖아 미친 새끼야. 너는, 너는 내가 시간을 갖자는 게 네 이 꼴 보자고 한 것 같냐?"
"...다나, 다나."
"어 왜 불러 미친 새끼야."
"미안해... 개인적인 사정이라고, 했는데 못 믿어서 미안하고, 또 연락 늦게 봐서 미안,"
축 처진 채 다나의 어깨에 기대 읊조리는 염호의 목소리는 낮았고, 평소 자연스레 흘러나오던 힘은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염호의 끊이질 않는 사과에 다나는 욕만 중얼거렸고 이내 제 어깨에 기대고 있는 염호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아 제 눈과 시선을 맞췄다.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너한테 먼저 개인적인 사정이랍시고 그렇게 말한 거고.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인데 네가 또 걱정할까 봐 그랬어. 너 걱정... 걱정 안 시키려고 그런 건데 이 지경으로 만들어서 미안해."
이어진 말들은 다급했고 흐트러지려는 발음을 애써 붙잡고 다나는 말을 이었다. 눈가가 뜨겁게 올라와 눈앞이 흐렸지만, 눈을 깜박거리며 애써 염호를 응시했다.
그런 다나를 염호는 말없이 껴안았다. 축 처진 몸으로 기댄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힘없이 껴안았지만, 그에 다나는 울컥거리는 제 목소리를 애써 눌렀다.
"...다 정리한 거야?"
"어 그 전화 계속 오던 새끼 다 정리했어."
"무슨 일이었는지 이젠 말해줄 수 있고?"
"말하자면 긴데 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말해줄 수 있어."
서로의 귀에 울리는 목소리는 거친 빗소리와 엉켜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렇게 잇는 대화는 끊기지 않았다. 다나의 눈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비와 섞여들었고 뛰어오느라 젖지도 않았던 염호의 등은 비로 감싸진 지 오래였다.
둘에게는 어색한 화해였다. 반복되기 그지없는 대화였고, 누군가는 이 사과들에 이상하다고 말할 테며 누군가는 한쪽만 유리하다고 말할 대화였다.
염호는 분명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다. 잔뜩 캐물을 생각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그 화를 풀려면 한참이 걸리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염호는 제 특별과 닿음에 감사했고, 이전의 내용은 비가 씻어 내려간 것처럼 생각도 나지 않았다.
종잡을 수조차 없다. 남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것들로 가득했지만 이는 제 평범이었다. 특별히 저를 위해 찾아와 줬기에 닿은 평범. 누군가는 이를 청춘이라는 단어로 정의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하루에 일어난 평범이었다.
"...그럼 됐어. 고마워 다나."
"뭐가 고마워 미친 새끼야, 진짜 또라이 같은 새끼가 뭐가 고맙냐고..."
"사랑해줘서 고마워 다나. 사랑해, 다나."
나의 특별, 나를 위한 평범. 나는 그런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해.
VIII
장르: 로판(혁명물)
<산산히 부서지는>
익명
※유혈, 사망 소재, 강압적인 상황이 묘사될 수 있습니다.
황실의 어두운 일들을 도맡는 자. 황제의 충실한 심복. 모두에게 알려진 이름은... 황실의 개. 정확히 알려진 본명은 본인밖에 모르며 개인적인 정보들은 모두 지워졌다. 아니, 애초에 없는 것이었지. 매우 어린 시절 몰살당한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내려질 수 있었던 명령은 반란군의 작전기지에 침투하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반란군에게는 그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잘못된 명령이라는 것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허나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버려진 고아를 주워 키운 것은 황제였으니, 어찌 충실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죄악감에 발걸음이 더뎌지는 것은 필히 본인도 알고 있었으리라. 애초에 속까지 악한 자가 아니라는 것은 명실상부한 사실이었으니 그저 명령이라는 비겁한 방패 뒤에 숨어서 악행을 저지르는 약한 자. 그뿐이었다.
술집의 문이 역겨울 정도로 불쾌한 소리를 내며 열린다. 그다지 모습을 가릴 필요는 없었으나 뒤집어쓴 검은 후드를 벗어낸다. 아무 무늬 없는 검은 후드가 감추고 있던 빛이 머리칼 사이로 들어오자 의지를 벗어나 약간은 미간이 좁혀지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함께할 동료로 위장하려면 얼굴을 보여 신뢰라도 얻는 것이 좋을 것이며, 자신의 이름도 얼굴도 아는 자도 없지 않은가.
“염호?”
아니, 없어야 할 터였다.
이런 곳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사람. 아주 어릴 적, 마을의 전원이 몰살당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공포감을 새겨갔던 그곳에서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 죽은 줄만 알았던 어릴 적의 친구이자 이미 끊어져 본인만이 붙들고 있다고 생각했던 유일한 인연의 실.
“다나...?”
“네가 여긴 무슨 일인데? 아니지, 너 그동안 어디 있었어?”
염호의 반응에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바라보는 다나의 붉은 눈은 매섭다기보다는 반가움이 서려 있었다. 반가움에도 그저 무뚝뚝하게 이어가는 말들을 들으니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느끼기야 했으나, 어찌 반갑게 맞을 수 있을까. 지금은 처리해야 할 상대임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반란군. 그러한 불경한 단어로 묶일 만한 사람 아니겠는가. 불경한... 그래, 불경한.
“내가 갈 곳이 어디 있겠어. 그냥 여기저기.”
“그렇다고 연락 하나 없... 아니, 연락을 할 수가 없었겠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염호의 머리가 무겁다. 복잡한 것들이 얽히고 또 얽혀온다. 그는 악한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이었다. 본인을 키워준 황제도, 유일하게 받아주었던 친구도 선택할 수 없었다. 아무 대답 없는 염호가 이상하다는 사실 정도는 다나도 알고 있었다. 그리 둔한 사람은 아닐뿐더러, 그의 축 처진 귀와 변화 없이 일그러진 입꼬리가 설명하고 있었으니.
“너 어디 아파? 왜 이래?”
입만 벙긋거리는 염호의 꼴이 우습다. 고백이라도 하는 것 마냥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눈조차 마주하지 못하는 것이 꼭 잘못이라도 한 강아지 같지 않은가. 한참의 정적이 이어지고, 술집 안의 다른 동료들이 자신들도 있다는 것을 알리듯이 기침을 이어갈 때 즈음, 답답한지 연신 책상을 두드리던 다나는 염호의 손목을 그러쥐고 술집의 문을 열어 옆 건물의 골목으로 그를 데려갔다.
“너 진짜 뭔데?”
“하지 마.”
“뭐? 갑자기 뭘.”
갑작스럽게 내뱉은 한 마디는 다나의 화를 키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만난 상대에게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는지 깊은 한숨과 함께 염호를 벽으로 몰아붙이고는 이에 대하여 캐묻기 시작하였다. 다나의 얼굴은, 이어지는 말에 가득 찼던 답답함을 대신하여 놀람과 당황스러움을 표하게 되었다.
“하지 말라고, 지금 계획하고 있는 거. 너희 중에 첩자는 분명히 있고 계획은 이미 황실이 다 알아. 황실 측이 병력도 훨씬 많고, 너희가 이길 확률은 아예 없... ...!!”
어금니를 꽉 문 채로 낮은 목소리를 내뱉으며 겨우겨우 이어가는 말을 막은 것은, 이제 와 드는 죄악감도 자신을 키워준 상대를 배신한 것에 대한 미안함도 이제야 지옥 같은 나날들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도 아닌, 답지 않게 떨리는 채로 자신의 멱살을 그러쥐는 다나의 손이었다.
“어떻게 알았는데. 아니, 누가 알고 있는데.”
“...”
“아니지, 너 뭐야?”
털어놓는 것은 어렵지도 않았다. 그저... 마지막으로 남겨둔 인연의 실이자 인간성을 버리고 싶지 않음은 물론이고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적개심으로 붉게 빛나는 다나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 더욱 아려왔으니.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황실의 계획과 자신의 이야기들. 그리고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과 지금까지의 죄. 한참의 고해성사가 이루어질 동안에도 높게 뜬 달은 그 둘을 가만히도 비추었다.
“그래서?”
“그러니까 그만두라고. 내가 말한 계획을 비껴가더라도 병력은 넘쳐나고, 황제는 쉬운 상대가 아니야. 그리고 내가... ...”
“...”
아까보다 훨씬 무겁고 불편한 침묵.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이나 무거운 어깨. 염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황제의 정예들은 황실의 어디에나 깔려 있었고, 그가 이 모든 것을 다나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것 또한 모두 황제가 죽지 않으리라는 비겁한 예상 끝에서, 다나와 황제 아무도 죽지 않기를 바라는 약함에서 나온 타협안이었다. 간과한 것이 있다면,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다나의 리더십과 추진력이었겠지.
“포기 안 해.”
“왜? 질 확률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 왜 네 목숨을 던져? 그냥, 제발 그냥... ...”
이어지지 못하는 말의 끝이 흐려진 채로 둘의 주위를 맴돌았다. 바라는 것은 둘 모두의 생존과 행복. 이루어질 수 없는 상극의 것들이 얽힌 상황은, 그에게는 너무 버겁고 숨 막혔다.
“너 무슨...”
갑작스레 다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 염호에 다나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으나, 그의 상황을 이해라도 하듯이 그저 손을 들어서 그를 찬찬히 쓰다듬었다. 통치는 물론이요. 악명이 드높은 그 황제 아래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어왔고, 어떤 마음으로 제게 말을 꺼냈을까. 지금의 심정은 어떠할까.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힘에도 다나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고, 염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너는 너의 삶을 살아왔고, 나도 나의 삶을 살 거야. 계획을 취소할 생각은 없...”
“계획을 당겨.”
“어?”
“준비가 다 되었다는 건 알고 있어.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당장 해가 뜨자마자 황실을 향해. 내일은 황녀가 타국으로 넘어가는 날이니 어느 정도 인원이 빌 거야. 그러니까... 계획을 당겨서 살아남아. 차라리 악행의 마침표를 네가 맺어줘.”
어깨에 묻혀 조곤조곤 이어가는 목소리에는 그의 신념과, 결국은 체념한 듯한 담담한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이내 무표정으로 몸을 숙이더니 다나의 손을 그러쥔 염호의 눈은, 달빛을 닮아있었다. 아무 말 없이 낮은 자세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염호에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응.”
“그런데 다시 만났네.”
“그러게.”
“... 다시, 또다시 만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묻어주고 만나줄 거야?”
“응.”
“내일,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만나자.”
“그래. 그러자.”
서로가 못 만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을 이어간다. 차가운 구름에 달빛이 사그라드는 것이 느껴진다. 다나의 손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염호는, 직후 다나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더니 검은 후드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는 황궁으로 돌아갔다.
-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염호가 주고 간 쪽지에는 황실의 지도와 함께 각 건물의 약점이랄 것들이 모두 담겨있었다. 모두가 다쳤으나 결국은 주도권을 되찾은 것은 반란군도, 황제도 아닌 혁명군이었다. 주도권이 바뀐 이때에, 결국은 황제의 처형식이 집도 되었다. 고통 받던 모두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황제의, 아니. 황제 측의 사형 집행을.
“너...!”
그 자리에는... 황실의 가장 충성스러운 개가 빠질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보자고 했잖아.”
“다시 만날 수 없을 줄 알았지?”
“내 이야기의 끝이 너로 인해 맺어져서 좋았어. 사랑해, 다나.”
마지막 마디만을 남기고, 그의 달빛은 무참히도 사그라들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