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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호다나합작

    WRITING

     

    목  차

    1. <무제>  바로, 사극

    2. <주사(酒邪)>  티아, 로맨스

    3. <guinzaglio (목줄)>  슈가펌킨, 느와르

    4. <내일 보자>  마젠타, 기억

    #5~#8 : WRITING2

     

     

     

    I

    장르: 사극

    <무제>

     

     

     

    바로(트위터 @fast_you_)

     

    *사망소재주의

     

     

    이것은 아주 오래된 나의 이야기다.

    .

    .

    .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제 동료의 칼 소리였다. 다나는 멀리서 그를 불렀다. 귀를 쫑긋거리는 염호가 보였다. 저게 다 들리면서 무시하는구나, 본인이 혼혈이라 피해가 갈까 걱정해 무시하는 것이 분명했다. 저녁쯤 같이 훈련을 하는 사람들이 사라져서야 염호는 다나에게 늦은 인사를 건넸다. 자리를 옮겨 술을 기울이며 주막에 앉아 둘은 얘기를 하였다. 사람으로 태어나 무관으로 죽겠다는 옛 약속이 무색하게 피곤함에 지친 기색만이 다나의 눈에 보였다. “네가 계속 멍청한 놈들 눈치만 보니깐 답답하다.” 가볍게 던진 말에 상처받을 만도 한데 염호는 괜찮다고 하였다. 이내 미안한 마음이 생긴건지 다나는 염호에게 제안을 했다. “이따가 돌아가는 길에 장터나 구경할래? 매일 여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매일 쉬는 것도 아니잖아“ 잠깐 고민을 하던 염호는 웃으며 승낙을 했다.

    .

    .

    어두울 법도 한데 장터 안에 들어서자 밝은 길이 드러났다. 다나의 발걸음을 따라 염호도 천천히 걸음을 하였다. 달이 밝아도 별이 선명한 날이라 하늘을 등불 삼아 장터에서 산술과 저잣거리를 두고 한밤에 누각에 앉아 둘은 천천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아까 일은 신경 쓰지 말라는 염호의 말에 다나는 침묵했다. 범과로 추정되는 혼혈이 사람을 죽인다는 무성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최근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시체가 나왔고 민심을 돌리기 위해 만만한 약자를 상대로 낸 소문이 분명했다. 급하게 사야 할 물건이 있다고 해서 잠깐 자리를 뜬 염호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 아마 피해 본 백성 중에 한 명이 울분을 터트리며 달려든 거겠지 라고 말하며 염호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계속해서 술잔을 기울였다. “분명 내가 혼혈이라고 싫어하는 무관들도 있을 테고 한성부 무과을 쳤을 때도 내가 혼혈이니깐 훨씬 유리할 거라고 나는 산에 던져놓고 시험을 쳐야 한다고 따지는 놈들도 많아서 넌 어릴 때부터...” 술에 취한 건지 아까 주막에서 해야 했을 말을 지금에서야 말을 하더니 지친 건지 다나에 옆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누각에서 잠들면 추울 텐데 잘도 자는구나” 밤새 자리를 지키는 풀벌레와 다를게 없는 모습이었다.

    .

    .

    어젯밤에 평화는 꿈이었다는 듯이 백성들의 비명과 울음이 제 귀를 찔렀다. 시체에 분명한 혼혈에 흔적이 남아 있었다. 소문이라기에는 너무 확실한 증거에 다나는 머리가 아파졌다. 어제 간 장터와 떨어져 있지 않은 장소에 잠깐 급한 물건을 사야 한다고 사라진 염호의 모습이 스쳤다. 아니겠지…. 아닐거야 그날부터 다나는 염호를 눈에서 떼지 않았다. 연모하는 여인이 자신을 살인자라고 의심하는 것에도 염호는 사나운 기색 없이 일에 집중하였다. 역시 본인이 괜한 오해를 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다나는 염호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 밤에 염호에게 찾아갔다.

    그때 살이 찢어지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저놈이 만약 그 살인자라면 잡아서 넣는다면.. 내 동료가 의심받을 일도 없을 거다.” 조용히 시선을 떼 살인자를 보았다. 오늘은 달이 힘겹게 비추던 날이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호랑이 혼혈이 확실했다. 쫑긋 올라온 귀와 꼬리까지 애석하게도 자신의 동료와 너무 닮아 다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밉겠지 노력해도 혼혈이라는 이유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다나 자신도 죄 없는 백성을 죽이는 것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

    .

    해는 달과 달리 밝아서 사람을 죽인 자신의 동료였던 염호의 얼굴이 선명하게 잘 보였다. 뒤에서 멀리서 누군가 찾아왔다는 말에 급히 다나는 자리를 옮겼다. 평소에 염호에게 비아냥거리던 양반이 얼굴이 파랗게 질려 말했다. 어제 여기 소속에 한성부 무관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봤다는 얘기였다. 아마 가까이 있던 나도 염호가 잡히면 무사하지 못 할 테니 내가 의금부에 밀고하라는 말이겠지.

    .

    .

    그날 그 양반은 의금부에 밀고를 넣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증언해야 했다. 결국 염호를 잡아 죽이는 것은 한성부인 제 몫이 되어 돌아왔다. 너는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내 칼에 맞아 죽는 순간까지 나를 쳐다보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

    .

    잠깐의 소란이 지나자 어느 밤에 그 양반은 나를 불러 조용히 말했다.

    “사실 혼혈이 사람을 죽인다는 소문은 내가 냈다” 사람을 죽이고 다닌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은 오랫동안 준비한 한성부 시험에 떨어지고 염호는 혼혈이라 더 유리한 조건에서 동물인 주제에 자신도 떨어진 시험에 붙었다는 이유였다.

    그날 장터에 나와 염호가 있었던 일도 모두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피가 묻은 노리개를 내 눈앞에 던졌다. “웃기지 않느냐? 동물이 사람을 사랑하고, 널 주고 싶어서 급하게 사러 간 모양인데 넌 바보같이 내 속임수에 넘어간 거다. 난 병에 걸려있어 네 칼에 죽어도 상관없다. 그놈이 고통스럽게 죽는 모습을 보았으니 너도 날 죽이고 살인자가 되어 똑같이 죽어라”

    그 말에 다나는 칼을 뽑았다.

    이미 식은 시체 앞에서 상기된 얼굴로 많은 생각을 하던 다나는 그날 그렇게 사라졌다.

    .

    .

    다 얘기했냐? 서류를 보던 다나는 진지하게 읽고 있던 혜나의 얼굴을 보았다.

    “아니 언니~염호 오빠랑 언니랑 이름이 똑같잖아. 악마오빠가 준 옛날 이야기책인데 신기하잖아! 오래된 책이래!”

    “12살 애한테 그런 책을 준 놈을 조져야 한다는건 알겠다.”

    다나의 말에 혜나는 열을 내며 말 했다.

    “혹시 알아? 전생에 그런 일이 있어서 지금 사귀는걸지~”

    “그런거 다 미신이야”

    말을 마친 다나는 서류를 정리하며 책에 눈길을 한번 주더니 염호에게 향했다.

     

     

     

     

     

     

    II

    장르: 로맨스

    <주사(酒邪)>

     

     

     

    티아(트위터 @tia_kmk6911612)

     


     

     

     "다나야, 전에 봤던 그 남자는 요즘 안보이더라?"

     "아… 염호?"

     
     술잔을 기울이던 다나의 손가락이 멈췄다. 짧은 공백 사이에 많은 기억들이 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염호는 제게 있어, 좋은 남사친 정도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그 정도. 가끔가다, 얘랑 사귀면 어떨까. 하는 질문들이 떠오르곤 했지만, 상상은 상상인 대로가 좋았기에 거기서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염호는 항상 친절하고 좋았다. 아니, 너무 친절한 점이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다나가 술을 마시는 날에는, 새벽이라도 다나의 집에 들러 상태를 확인하곤 했다. 그럴때 마다 다나는, 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도 똑같이 행동하겠지. 그는 너무 친절하니까. 라며 자기자신을 토닥였다. 이 감정이 헛된 것이라는 상실감이 조금이나마 사라지도록, 밤새도록 자신을 다독였다. 한참동안 그에 대해 생각하다가, 괜한 심술에, 마음에 있지도 않은 말을 내뱉었다.

     
     "걔랑 좀 싸웠어."

     "정말? 사랑싸움이야?"

    "아니… 애초에 사귀지도 않았어."

     "…정말로…?"


     신난 듯 입을 놀리던 동창이, 젓가락을 쾅 내려놓고는 다나를 쳐다보았다. 동창의 커진 눈이, 그녀가 매우 놀랐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쾅 소리에 놀란 다른 동창들이 다들 다나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시선 집중 받는 건 싫은데. 애초에 진짜 싸운 것도 아니고…의도치 않은 시선들에, 다나는 새 잔을 채우며 괜스레 주제를 돌렸다. 
     
     
     "아니 그나저나…"

     "걔는 너 좋아하는 티 많이 나던데. 네가 눈치 못 챈 거 아니야?"

     염호가 날 좋아한다고? 아니지, 적어도 내가 좋아한다면 모를까. 다나가 잔을 내려놓고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거 아니야. 걘 나 안 좋아해. 그냥 성격이 착해서 챙겨주는 거지. …-그럼 저번에 그건 뭐야? 우리끼리 한번 마셨을 때. 그때 같이 따라와서 너 계속 챙겨줬잖아. 술도 대신 마셔줬고… 난 너 남자친구인 줄 알았어. 동창의 말이 끝나자, 다나는 홀로 과거의 시간들을 되새겨보았다. 그랬지, 처음에는 친구라고 소개해 주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 말을 하는 것을 잊어버렸었다. 그리고… 그러고는, 정말 커플인 마냥 서로를 마주 보고 웃기도 하였으며, 취했다며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기도 했지. …그게 정말 우정이었을까?  다나의 표정이 어두워질 즈음, 동창이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미안.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줄은 몰랐어."

     "…어? 아니야. 싫어하는 거 아니야. 그냥… 그냥 정말 커플처럼 굴었는지 생각 좀 했어."

     "아 그래? 다행이다!"


     다시금 시끄러워진 술집에서의 회식이 끝날 무렵, 다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과음한 듯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과의 얘기가 그리도 재밌었는지, 주량도 잊어버리고 술을 물처럼 마셨던 탓이었다. 차가운 저녁 공기에 머리를 식히고 있을 때, 문뜩 생각난 사람이 생겼다. 염호. …정말 걔가 날 좋아해서 날 챙겨준 걸까? 추위에 붉어진 손가락으로 염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다나? 이 시간에 웬 전화야?"

     "…나 술 마셨어. 오늘은 챙기러 안 오냐?"

     "…허…어디야? 지금 갈게."


     염호의 허탈한 웃음이 전화기 너머 다나에게로 전해졌다. 다나 또한 눈꼬리를 휘며 장난스레 따라 웃었다. 추운 날씨 탓에 입김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따스했다. 아무래도 염호와 커플로 보인다는 말이, 자신의 태도 때문에 나온 듯했다. 어떤 경우에도, 이런 웃음은 나오지 않았으니. 누가 봐도 커플이었겠지.  
     5분 정도가 흘렀을까, 가게 앞에 쪼그려 앉은 다나의 앞에 발걸음이 들렸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하니, 염호가 피식 웃으며 외투를 벗었다. 


     "얼마나 마신 거야. 원래는 조절 잘 하면서."

     "누구 때문에 조절이 안되던데?"

     "그게 누군데?"

     "글쎄. 그런 게 있어."


     그게 뭐야. 어이없다는 듯 웃은 염호가, 자신의 외투를 다나에게 둘러주었다. 네가 이러니까 다들 오해하는 거 아니야. 외투를 챙겨 입은 다나가 장난스럽게 염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자, 그게 무슨 말이야-라며 자연스레 다나의 어깨를 끌어안은 염호가 말했다.


     "다들 우리 사귀는 줄 알더라."

     "…누가 그래?"

     "저번에 술 같이 마셨던 동창이."

     
    …네가 너무 진득하게 날 바라봤나 보지. 다나가 보이지 않게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염호를, 다나가 다시 한번 툭툭 쳤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니가 자꾸 술 마신 후에 날 끌어안아서 그런 거 아니야. 내 말 틀려? 네 주사 때문에 누가 봐도 커플처럼 보였겠지. 내 술도 계속 마셔주고. 그리고 또…
     다나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염호가 제게 했던 것들을 읊어나갔다. 염호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나를 제 품에 끌어당기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귀엽네 귀여워, 근데 그거 내 주사 아니야. …그럼 지금까지 했던 건 뭔데? 차마 입에 담지 못한 말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오늘도 우리 집까지 왔다가 가?"

     "그래야지. 예전보다 더 취했는데. 걱정이 돼, 안돼?"

     "내가 여자친구도 아닌데. 안되지."

     "…뭐 어때. 할 수도 있지."


     너무나도 태연하게 말하는 염호가 밉기만 했다. 나만 진심이지 나만. 아직 자신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말하면 자신이 홧김에 고백할까 봐 무서웠다. 말 조심하자, 말 조심…


     "너 나 좋아해? 왜 자꾸 챙겨줘. 오해하게…"


     허어. 이미 말은 내뱉은 후였다. 말 조심하자고 각오한 지가 몇 초 전인데… 미쳤지 내가. 술이 독이지 독. 다나가 홧김에 뱉은 말에, 염호의 발이 멈췄다. …설마 진짜 내 착각인가...? 다나가 여러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도. 아니 다행이랄까? 예상외로, 염호는 붉어지다 못해 터질듯한 얼굴을 겨우 얼굴로 가리고 있었다. 


     "……티 많이 났냐?…"

     "……허."


     화낼 것 까지는 예상했는데… 아니 이건 정말… 예상 외였다. 진짜? 진심인 건가? 내가… 내가 착각한 게 아니었던 건가? 혼란스러운 다나의 앞에, 염호의 눈이 보였다. 그 역시 많이 혼란스러운 듯 보였다. …술김에 저지르는 거야. 그래, 술김에. 


     "내가… 내가 너 여자친구 할게. 너도 나 좋아하고, 나도 너 좋, 좋아하니까."

     
     말없이 다나의 말을 듣던 염호가, 손을 뻗어 다나를 다시 한번 껴안았다. 암묵적인 허락. 그의 심장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니, 어찌 보면 내 심장 소리일지도 모른다.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뭐, 그래도 지금만큼은 그 어느 쪽이라도 괜찮았다. 다나 또한 그의 허리를 얼싸안았다. 그에게도 내 심장소리가 들릴까? 제 턱을 염호의 어깨에 걸치고는, 눈을 감았다. 아까 가게 앞에서 느꼈던 따스함은, 이런 것이었나 보다. 아마도, 사랑. 사랑일 것이다. 


     

     

     

     

    III

    장르: 느와르

    <guinzaglio (목줄)>

     

     

     

    슈가펌킨(트위터 @sugarpumpkiin)

     


     

     

     

    총구의 끝이 서로를 향했다. 하나는 그의 머리통에, 다른 하나는 그녀의 심장에. 누군가 당긴 방아쇠에 그저 붉은 장미 하나를 피워내곤 스러질 그런 관계였음에도, 그녀의 시선이 또는 그의 시선이 강렬하게 서로를 얽매였다. 끝낼 수 없다면 시작조차 하지 말았어야지.
     
    날 만난 네 잘못이야.
     
     그녀의 입술이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


     


    Forza(힘)과 La fiamma(불꽃)는 여러 의미에서 깊게 얽혀 있었다. 단순히 호의 가득한 관계라 하기엔 이미 붉은 피들이 낭자했으며, 그렇다고 해서 증오의 관계라기엔 암묵적으로 넘어간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런 관계를 뭐라 정의하던가? 애증이라 칭하기엔 애정이 넘치고 애정이라 부르기엔 살의가 가득했으니, 어느 누구도 감히 정의 내릴 수 없을 것이다.
     
    두 조직은 닮은 듯 닮지 않았다. 오직 강한 힘 만을 숭배하며 앞뒤 재지 않고 직접 피를 뒤집어쓰는 Forza와 달리 은밀하게, 하지만 누구보다 확실히 숨통을 조이는 것이 La fiamma가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눈 씻고 봐도 어느 하나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서로였기에, 이들 조직원들은 눈만 마주쳤다 하면 서로를 힐난하기 일수였다.
     
    애증과 살기는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그렇다면 애정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본디 실체를 지니지 않은 것들이 때론 더욱 강한 법. 그들의 보스가 꽤나 잦은 만남을 가지더라- 라는 진실 모를 소문들이 수면 아래에서 아우성 쳤기에, 감히 사실 여부를 따질 수 없는 이들은 암묵적으로 동조했다.
     
     
    __
     
     
    두 조직의 첫 만남은 그리 달콤하지 못했다. 마지막 남은 이의 심장을 향해 총을 겨눈 뒤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 다나는 덧없이 바닥을 향해 스러지는 이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런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말의 동정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해야 할 일 하나를 끝냈다는 모종의 성취감만이 남았기에, 다나는 총을 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 가자 "
     
    " 가긴 어디를 가? "
     
    골목을 울리는 낮은 중저음에 다나는 고개를 까딱하며 뒤를 돌았다. 처음보는 얼굴이었지만, 다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세상 모든 빛을 흡수한 듯 새까만 블랙 수트와 어깨를 덮은 하얀 모직 코트 아래로 단단한 뼈와 균형 잡힌 근육이 느껴졌다. 건장한 남성임을 증명하는 몸과 달리 곱상한 얼굴이 꽤나 잘생긴 터라 봐줄만 했다. 노골적인 시선으로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은 다나는 호오- 하는 감탄사를 덧붙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 끈적한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낸 염호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 Forza가 뒤 없이 막무가내라는 건 들었지만, 이정도일줄은 몰랐는데 "
     
    염호는 당장이라도 저 하얀 목덜미를 붉은 피로 물들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제 손으로 직접 자신의 보스를 죽이고 조직의 정점에 올랐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는 없었기에, 염호는 세상물정 모르는 애송이에게 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몹시 기분이 상했다.
     
    " 방금 네가 네 손으로 궤멸시킨 그 조직이 내 거래 상대였다는 건 알고 있긴 한가? "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그녀는 이내 고개를 숙이고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한순간 살의가 가득한 그녀의 표정에 염호를 포함한 주변인들 모두가 일순 긴장했다.
     
    " 근데? 어쩌라고 "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겁대가리를 상실한 그녀의 대답에 염호는 기가 찼다. 도대체 뭘 믿고 저리 행동한단 말인가? 하지만 동시에 염호는 그녀가 관심이 생겼다. 그럼 아무렴. 이 세계에서 저런 패기 하나 없이는 살아남기 힘들지. 큭큭거리며 웃던 염호는 크게 웃음소리를 내며 박수를 쳤다. 
     
    " 대단해 정말. 소문이 사실이었군. "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아. 잠깐 시간 좀 내주지? 그 말은 진심인 듯 염호가 한 손을 들어 그녀에게 총을 겨누던 자신의 이들을 제지했다. 그의 제스처에 하나 둘 총을 내려놓자 다나는 이내 한숨을 쉬며 자신의 부하들에게 말했다.
     
    " 귀능이 빼고 나머진 돌아가 있어. "
     
    다나의 말에 놀란 이들이 언성을 높였다.
     
    " 네? 하지만 보스! "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나가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바라보자 그녀의 시선에 압도된 이들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알겠습니다 보스. "
     
    이 모든 광경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염호는 다나가 자신의 쪽으로 걸어오자 크나큰 영광이라는 듯 무대 위 사회자나 할 법한 인사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 당신의 결정에 감사를. "
     
     
    __
     
     
     
    온전히 둘 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거대한 저택의 넓은 방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다나에겐 너무나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눈 앞의 남자가 강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게 아니라면 제가 무슨 짓을 할지 알고 이렇게 단 둘이 냅두겠는가. 방안은 꽤나 단조로웠다. 짙은 색을 내는 나무 원목과 미묘한 조화를 이루는 버건디 색이 어쩐지 차분한 분위기를 내는 듯했다. 방도 꼭 지같이 생겨서 말이야. 천천히 방안을 살펴보던 그녀의 곁으로 염호가 다가왔다. 
     
    " vino rosso(레드 와인)로 준비했는데 괜찮지? "
     
    다나는 잔을 들어 그가 채우는 와인을 바라보았다. 선홍색을 띠던 와인잔이 어느새 피보다 더 검붉은 색을 지녔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그 색깔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다나는 이내 입에 가져다 대고는 한 모금 머금었다. 염호는 턱을 괴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정 머리칼과 흰 피부와 더불어 짙은 속눈썹 아래로 은은하게 빛나는 붉은 적안은 너무나도 마치 하나의 명화를 보는 듯했다. 마침내 시선을 내려 와인을 담아 붉어진 그녀의 입술에 닿았을 때, 염호는 자신도 모르게 해선 안될 생각을 하고 말았다. 내가 지금 미친 건가. 어느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했지만, 스스로의 행위에 얼굴이 화끈해진 염호는 와이셔츠 하나만을 남긴 채 수트를 벗었다. 한손으로 거칠게 넥타이를 잡아 느슨하게 만들자 열린 틈 사이로 그의 굵은 쇄골 뼈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 말없이 와인을 훔치며 끈적한 시선으로 그의 손을 쫓던 다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 그래서 할말이 뭐야 "
     
    그러자 염호는 와인 잔을 느긋하게 흔들며 말했다.
     
    " 할말? 없는데? "
     
    그냥 니가 궁금했을 뿐. 그 잘생긴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웃자 다나는 코웃음을 치며 싱겁기는.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남은 와인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은 뒤 잔을 소리가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 놓았다.
     
    " 간다. "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 순간, 염호가 그녀의 팔목을 잡아 벽으로 밀치며 말했다.
     
    " 아직 난 보낼 생각이 없는데 말이지 "
     
    다나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저 찬찬히 제 눈을 바라보는 그를 응시했다.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으니, 얼마나 고요했는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붉은 적안만을 가득 담던 그의 시선이 어느덧 자신의 입술에 닿았다. 남자치고는 꽤나 긴 속눈썹이 그의 외모를 더욱 빛낸다고 다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한참 제 입술을 바라보던 염호는 이윽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입술을 제 것으로 덮었다.
     
    야설스러운 입맞춤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집요하게 그녀의 입술을 탐하던 염호는 천천히 그녀의 허리를 쓸어 내리고는 이내 와이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의 손길이 닿자 작게 움찔한 다나의 모습에 염호는 허리가 예민한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얼마간의 입맞춤이 오간 건지 쉽사리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나고 염호는 그녀를 안아들고는 제 침대로 향했다. 단순히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가벼운 일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적어도 스스로 만든 이 관계가 족쇄가 되어 자신을 가둘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염호는 동시에 생각했다.
     
    이 세상 어디에도 그녀를 밀어낼 남자는 없으리.
     
     
    __
     
     
     
    피가 차가워지는 듯했다. 어느 누구 하나 믿을 수 없는, 배신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난무하는 세계라는 것을, 그리고 그 세계의 중심에 자신이 서있음을 염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알량한 희망이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되어 제 목을 노리고 있었다. 감히 서로의 몸을 나눴다고 그녀를 신뢰하다니. 일방적인 믿음이었으니, 어쩌면 이건 배신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과거의 제 치기를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테니. 염호는 아직도 귓가에 그녀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눈을 감으며 주먹을 쥔 그는 금장으로 장식된 총을 잡으며 말했다.
     
    " 찾아. "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찾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없었기에, 더욱이 모두가 그녀가 커다란 자취만을 집중했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동맹 조직을 초토화시키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염호의 목적은 단 하나, 그녀를 찾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그녀의 그 예쁜 입술로 직접 듣지 않으면 당장 미칠 거 같으니 말이다.
     
     
    __
     
     
     
    의외로 다나는 멀리 도망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염호쪽에서 그녀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오기전에 이미 손을 봐줬는지 컨테이너에는 비릿한 피냄새와 함께 유혈이 낭자했다. 아무도 없었다. 오직 그녀 하나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내 쪽에서도 구색을 맞춰 줘야지. 염호는 손을 들어 조직원들을 뒤로 물렸다. 아무도 들어오지 마. 라는 말을 남긴 채 그가 앞으로 걸어가자 그 분위기에 압도된 이들이 고개를 숙이며 문을 닫았다.
     
    철컥
     
    염호가 허리춤에 넣어두었던 총을 꺼내 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다나 역시 웃음을 지으며 총을 꺼내 들었다. 총구가 서로를 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느릿하게 걷던 염호가 어느새 다나의 앞에 다가갔을 때, 염호는 그녀의 머리에 다나는 그의 심장에 총구를 가져다 대었다. 
     
    " 왜 그랬어? "
     
    염호가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와 달리 그의 시선에는 미련과 차마 떨치지 못한 하룻밤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 그의 시선을 읽은 건지 다나가 한손으로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 왜가 어딨어? 정 궁금하면 이해 관계가 맞지 않아서라고 해 두지. "
     
    염호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대에는 분명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비록 만난시간이 길다고 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짓을 벌일 사람이 아님은 알고있었다. 그녀의 강함은 그 정도를 과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까. 이것 마저도 그녀에 대한 알량한 믿음이냐 묻는다면 염호는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다만 이 세계의 정점에서 군림하던 그에게 직감이란 때론 논리보다 더욱 좋은 무기가 되곤 했으니, 그는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화가 나는 이유는, 단순히 그 상대가 제 동맹 조직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에게 일말의 언질 없이 이런 일을 벌인 그녀가 괘씸해서 일까. 어느 쪽인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적어도 용서를 입에 담기에는 그녀가 저지른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제가 살고 있는 세계란 그런 것이니까.
     
    염호는 방아쇠에 걸친 손에 힘을 주려 했다. 하지만 마치 안전핀이 걸린 것 마냥 당길 수 없었다. 제 손으로 끝낼 수 없는 관계란 마치 사방이 막힌 방안에 갇힌 느낌을 준다. 나의 의지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끝맺음을 상대방의 손에 맡겨야 하다니, 이 얼마나 비참하단 말인가? 끝낼 수 없다면 시작조차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맞았다. 다만 그가 이 관계를 감히 시작하지 않을 수 있었을지에 대한 의문만이 남을 뿐이었다. 결국은 그녀의 머리로부터 총을 멀리한 그가 거칠게 얼굴을 쓸어 내리며 말했다.
     
    " 젠장! "
     
    염호가 먼저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내비치자 다나 역시 총을 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 왜 못하겠어? 몸 몇 번 섞었다고 사랑이라도 느낀 거야? "
     
    그렇게 안 봤는데 순수한 도련님이네- 다나가 비꼬듯 말하자 염호가 그녀의 멱살을 잡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 닥쳐 "
     
    그와 그녀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자 그녀의 시선이, 또는 그의 시선이 서로를 강하게 얽매였다. 혼란이 가득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다나는 이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 날 만난 네 잘못이야. "
     
    그러니 그 책임도 네가 지는게 맞아.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염호는 분명 그녀가 제게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인가. 그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것도 잠시 그녀가 반대로 그의 멱살을 잡고는 자신 쪽으로 잡아 당겨 입을 맞췄다.
     
    염호는 더 이상의 생각을 포기했다. 애초에 그녀가 끝낼 생각이 없다면 그만이었다. 그녀의 손에 자신의 목줄을 쥐어 준지 오래었으니까. 염호는 제게 안겨오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 Sono il tuo.(난 당신의 것) " 

     

     

     

     

    IV

    장르: 기억

    <내일 보자>

     

     

     

    마젠타(트위터 @MagenTaAugest)

     


     

     

     

    잠에서 깬 다나가 주위를 둘러본다. 새하얀 벽지, 햇빛이 드는 창, 이불과 자신이 입고 있는 옷에 새겨진 어느 대학 병원의 이름. 공기 중에 퍼져 있는 이 의약품 냄새까지, 전부 이곳이 병원이라 말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왜 병원에 있지? 싶었다. 막 잠에서 깨 멍한 머리는 오늘 이전에 있던 일을 떠올려내는 데에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아, 맞다. 폭발 사고에 휘말렸었다. 구조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는데, 중간중간 정신이 들어 벌겋게 타오르는 불길을 보았던 것도 같았다. 황급히 자신의 몸을 살핀다. 


    ‘뭐야?’


    심각하게 다쳤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몸은 군데 군데 붙어 있는 밴드들과 가볍게 둘러져 있는 붕대를 제외하고는 꽤나 멀쩡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아팠는데. 설마 내가 정신을 잃고 꽤 시간이 많이 지난 건가?
     묘한 이질감을 떨쳐내고 자신의 병상 옆 바닥에 놓인 슬리퍼를 신고 자리에서 일어난 다나가 병실 안을 살폈다. 쾌적한 1인실. 새삼 돈 걱정이 들었다. 병실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수첩이 눈에 들어왔다. 수첩을 집어 들고 펼쳐 보았다. 


    [기억해야 할 것]


    자신의 필체로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다나가 미간을 좁혔다. 자신은 이런 글을 쓴 기억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런 수첩 자체를 처음 봤다. 수첩의 커버를 살피다 자신이 입고 있는 환자복에 새겨진 병원의 마크가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병원에서 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사실 또한 다나의 기억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일단 내용을 더 읽어 보기로 한 다나가 수첩을 다시 펼쳤다.


    [1. 나는 사고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하루가 주기)]


    초장부터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기억하지 못한다니? 하지만 충격에 잠겨 있기도 잠시, 다나는 이내 납득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이 수첩에 글을 썼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말이 된다. 언젠가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특정 시점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 끝에 적힌 하루가 주기라는 말을 보아 하니, 아마 자신은 오늘 밤 잠에 들면 다시 이 수첩에 대한 내용을 잊어버릴 것으로 보였다. 


    [2. 나는 옆 병실의 염호라는 환자와 사귀는 사이다.]


    순간적으로 욕이 튀어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이건 곤란했다. 자신이 하루 주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보다 이게 몇 배는 곤란했다. 환자라는 점을 보아 아마 병원에서 만난 사이일 텐데, 그 말은 어제의 기억이 사라진, 방금 막 혼수 상태에서 태어난 것과 같은 상태인 오늘의 다나와는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근데 그 사람이랑 사귀라고? 아니, 어제도 그 전날에도 사귀었던 사이라고 인정하라고? 엄마에 등쌀에 떠밀려 선을 보러 가던 날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드륵, 하는 소리가 들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간호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에 따라 들어온 의사가 밤새 잘 주무셨냐며 인사를 건넸다.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다나가 침대로 돌아가 앉았다. 아침 진료 시간인 모양이었다.

     


    -

     


     의사의 진료가 끝나고, 다나는 수첩에 적혀 있던 내용을 생각하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옆 병실이랬다. 그쪽도 1인실인 걸 보니 돈이 꽤 있는 모먕, 아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찾아가야 할 것 같았다. 찾아가서, 얼굴을 보고, 아무리 우리가 어제까지 사랑을 나누었던 사이라 해도 오늘의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 같다고 전해야 할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할지를 속으로 정리한 다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니 자신의 병실이 두 병실 사이에 끼어 있어, 어느 쪽이 염호라는 사람의 방인지 확인해야 했다. 오른쪽 방이네. 염호라고 쓰인 환자명 팻말을 보며 다나가 생각했다. 똑독, 하고 문을 두드린 다나가 예의 바른 노크와 다르게 겁 없이 문을 열었다. 들어오라는 허락도 들리지 않았지만 다나는 지금 무슨 말로 염호라는 이를 차야 할까, 라는 생각에 사로 잡혀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다나가 문을 열자 마자 눈에 강하게 쬐이는 햇살에 눈살을 찌푸렸다. 눈이 빛에 조금 익숙해지고 나서 눈을 뜨자, 병실의 주인이 눈에 들어왔다. 


    “일어났어?”


    다정한 목소리, 햇살을 받아 밝은 주황색으로 빛나는 간간히 검은색이 섞인 머리칼, 병실 안을 가득 채운 섬유 유연제의 향.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에 담긴 은은한 미소를 보는 순간, 다나는 느꼈다. 아. 나는 오늘도, 오늘을 잊을 내일도 너를 사랑하겠구나.


    -


     당연하다는 듯 염호의 병실로 환자식 두 개를 가져온 간호사를 다나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제가 여기 있을 줄 어떻게 아셨죠?”
    “네? 그야 이 시간엔 항상 이 병실에 계셨잖아요.”


    간호사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 든 다나가 한숨을 쉬자 마주 보고 앉은 염호가 작게 웃었다.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봐. 다 말해줄 테니까.”
    “내가 이 증상을 앓은 지 얼마나 됐는지 말해줘 봐.”


    다나가 밍밍한 시금치 무침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4개월…정도 됐나.”
    “너랑 나랑 사귄 건 며칠째?”
    “3개월 정도.”


    다나가 씹던 것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자 염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이삼 주 정도는 혼수 상태였으니까, 따지고 보면 병원에서 만난 이후로 쭉?”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고백은 누가 먼저 했는데?”
    “언제는 내가, 또 언제는 네가.”


    간이 되어 있기는 한 건지, 영 입맛을 돋우지 못하는 음식들에 다나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난 내일이 되면 다시 오늘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텐데, 나랑 사귀는 건 안 힘들어? 그 정도로 날 사랑해?”


    약간의 비꼼이 섞인 듯 들리는 질문에도 염호는 묵묵히 식사를 하며 답할 뿐이었다.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넌 날 사랑할 텐데.”


    한 대 때려주고픈 뻔뻔함인데, 아까의 기억을 떠올리자니 아예 틀린 말도 아닌 듯 싶어 다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올라가는 염호의 입꼬리에 폭력적인 충동이 들 뻔했지만 참기로 했다. 어쨌든 그도 환자였다. 어? 그런데….


    “넌 어디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거야? 다친 곳도 없어 보이는데.”
    “왜. 꾀병인 것 같아?”
    “그런 뜻이 아니잖아.”


    텅 빈 밥그릇 위에 젓가락을 얹어 내려놓은 염호가 다나를 바라봤다.


    “궁금하면 오늘 나랑 데이트해주든가.”


    허, 하는 헛웃음을 내뱉은 다나가 먼저 일어나 염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너 밥도 다 안 먹었잖아.”
    “뭔 상관이야. 데이트 하자며. 안 일어나면 들고 간다.”
    “들어주라, 그럼.”


    -


     병원에 마련된 정원으로 꾸며진 테라스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연인 사이였지만, 다나는 영 낭만을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숨 고르기에도 벅찼다.

     
    “왜 죽으려고 그래. 괜찮아?”
    “조용… 조용히 해 봐…. 죽겠다 진짜….”


    염호를 들고 테리스까지 오는 동안 이 놈을 내려 놓을까 수백 번은 고민했던 다나였다. 그런 자신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 앉은 이 녀석은 이 순간이 마냥 즐겁다는 얼굴이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나서야 겨우 원래의 호흡을 찾은 다나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뭐라도 좀 마실래?”


    염호가 자신의 지갑을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다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벤치에서 일어나 테라스 한 구석에 마련된 병원 카페로 향한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다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 자신이 들기에는 무거웠지만, 염호는 성인 남성이라고 치기에는 가벼웠다. 저 키에 비하면 더더욱. 확실히, 어디가 아프긴 한 모양이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돌아온 염호가 다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컵을 양손으로 잡고 따뜻한 기운을 즐기던 다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면 해가 서쪽 하늘 가운데 즈음에 걸려 있다.


    “조금 일찍 일어나지. 그럼 더 오래 볼 수 있었을 텐데.”


    다나의 시선을 따라 같이 하늘을 올려다본 염호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언제는 상관없다며. 어차피 내일도 볼 거고, 내일도 난 널….”


    아까 염호가 했던 말을 따라하려던 다나가 말을 멈췄다. 자신의 입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담자니 오그라드는 기분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것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염호가 하하 웃었다.


    “맞지. 내일도 넌 날 사랑할 거야.”
    “그으…래. 근데 왜 아쉬워하냐고.”
    “글쎄.”


    애매한 대답에 다나가 더 물고 늘어지려 하자, 유연하게 넘긴 염호가 대화의 주제를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 둘의 잔이 전부 빈 뒤에는 벤치에서 일어나 테라스를 빙 돌며 산책하기도 했다. 가족 이야기, 병원 밖의 원래의 삶 이야기, 퇴원한 후의 이야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어느새 노을이 지고 하늘이 거뭇거뭇해지는 것이다.


    “이제 들어가야겠네.”
    “낮에는 괜찮더니, 그래도 겨울이라고 밤에는 서늘하네.”


    어느새 테라스에는 둘만 남아 있다. 조금만 더 대화를 나눌까, 싶던 둘을 얼른 들어가라며 재촉하듯 하늘에서 불현듯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다나와 염호도 천천히 자신들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돌아간다. 아까 테라스에서 했던 이야기와 닮은 듯 다른, 그닥 중요하지 않은 적당한 대화를 나누며. 그러다 염호의 병실 앞에 도착하면 다나는 손을 흔들며 염호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한다.


    “오늘 데이트해줬으니까 말해줄게.”
    “뭘? 아. 너 어디 아픈지 말해준다고?”


    다나가 흔들던 손을 내리고는 고개를 끄덕여 이야기를 듣겠다는 의사를 나타낸다. 염호가 자신의 병실 문을 열어 다나의 팔을 잡아 끈다. 순식간에 병실 안으로 들어서게 된 다나가 야, 하는 소리를 내도 염호는 아랑곳 않고 다나를 침대에 앉힌다. 침대 옆의 창가로 가 창문을 여는 염호를 지켜보던 다나가 말했다.


    “뭔데 이렇게 분위기를 잡아?”


    손을 창밖으로 내밀어 눈송이가 손에 앉았다가 녹는 것을 지켜보던 염호가 다나의 말에 뒤를 돈다.


    “죽기 전에 언제 또 눈을 볼 수 있을지 몰라서 그래.”
    “뭐?”


    염호의 말에 다나가 되물었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병원, 다나가 입원한 4개월 내내 같이 입원해 있던, 이상하리만치 가벼운 염호. 아, 그러게. 수첩에 3번이 있었던 것도 같다. 의사가 들어오는 바람에 읽지 못했던 3번. 3번이 이것이었을까.


    [염호는 시한부다.]


    다나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자 염호가 창문을 닫고 침대로 가 다나와 마주보고 앉는다. 불 꺼진 병실 안에서 염호는 아무 말 없이 다나를 안아주었고, 다나는 아무 말 없이 염호의 품에 안겼다. 둘은 서로 마주보고 누워 밤새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고, 졸린 듯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는 다나를 지켜보던 염호는 다나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작게 말했다.


    “내일 보자.”


    눈이, 그친다.


    -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다나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새하얀 벽지, 햇빛이 드는 창, 이불과 자신이 입고 있는 옷에 새겨진 어느 대학 병원의 이름. 공기 중에 퍼져 있는 의약품 냄새까지, 전부 그곳이 병원이라 말하고 있었다.


    병실의 가운데에 자리한 테이블 위에 놓인 어느 수첩이 눈에 들어왔다. 병원의 마크가 그려져 있다. 수첩을 펼쳐 보자 안은 깨끗하다. 수첩의 스프링 사이에 끼인 종이조각이 원래 있던 첫 장이 찢겨 나갔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병실 문을 열고 나와 조용한 복도를 홀로 거닌다. 왼쪽 복도는 병실 하나를 두고 끝이 막혀 있길래, 오른쪽으로 걸어 나간다. 옆 병실의 환자명이 적혀 있어야 할 팻말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본 다나가 문득 든 충동에 그 병실의 문을 열었다. 


    창문으로 드는 햇살, 공기 중에 퍼진 은은한 섬유 유연제 향기.
    잠시 자리에 멈추어 섰던 다나가 이내 병실 문을 닫았다.
    왜 울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영 알 수가 없었다.


    -내일 보자,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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